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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역사, 영화 내용, 역사적 사실

영화로 보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영화로 보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영화로 보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영화로 보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이집트에 입성한 세계의 권력자 카이사르 앞에 두 개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하나는 몸종 아폴로도로스인데, 몸종 아폴로도로스에 의해서 양탄자에 포장된 클레오파트라였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하나는 비록 적이었지만 엄연한 이집트의 Patrones인 즉 이집트의 아버지 입장이었던 폼페이우스의 피가 뚝뚝 흐르는 목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이 두 가지 선물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시 정치, 군사, 또 통념상으로 클레오파트라보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훨씬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클레오파트라 자신도 카이사르가 여성의 매력에 이끌렸다는 단순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시오노 나나미는, 또 시오노 나나미 이야기하네요. 시오노 나나미는 참으로 흥미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죠. 여자들은 어떤 일이 뜻대로 되었을 때 그것이 사리에 맞아서 또 자기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라면 여자가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데 식은 죽 먹기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떠세요? 과연 그럴까요? 실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요하는 국제정치에서 그것도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단순한 여자의 미모에 이끌려 클레오파트라를 선택했다는 것은 유아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카이사르의 선택과 고려사항

카이사르의 선택에는 두 가지 점에서 고려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폼페이우스가 적이었지만 엄연한 로마인이었고, 그 로마인의 잘못은 로마인이 판결했어야 했습니다. 더불어 피보호자가 보호자를 죽이는 것은 로마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둘러싼 이집트의 환관들의 문제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환관들의 간섭과 농락에서 보다 자유로운 입장이 있었던 것이죠. 카이사르 선택에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바로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집트의 세력들은 카이사르의 적이 되지 못하죠.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불행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고대사회의 인류의 지적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 십 만권의 책들이 불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80만 권의 장본 중에서 약 40만 권이 불에 사라졌다는 것이죠. 이제 승리를 한 카이사르에게 마지막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카이사르의 다음 일은 휴식이었습니다. 그것도 매력적인 여인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환상적인 휴식 중에도 나일 강에 수원을 찾고 또 물이 차고 내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달력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런 가운데 카이사르의 일기라고 할 수 있는 내전기를 탈고하게 되죠. 그러나 그런 중에 갑자기 본국에서 급보가 날아듭니다. 바로 본국에 심어놓았던 안토니우스로부터 급보가 오죠. 소아시아, 오늘날 알바니아 지역 건너편인데 폰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로마군이 파견됐지만 진퇴양난에 처해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휴식을 취하던 카이사르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먼저 폰투스에 가서 반란군을 진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남겨두고 폰투스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도착한 것만을 보고 바로 폰투스의 반란군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승전 보고서를 원로원에 보내게 되는데 그 유명한 바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그 세 마디가 이 당시 카이사르가 썼던 것입니다.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어 로마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 모든 면에 있어서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독주는 원로원의 가치를 약화시키고 또 이에 대한 불만세력을 형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는 독재관이 되고 또 소수 특권층인 원로원 의원들의 수를 많이 늘렸습니다. 약 900명으로 늘립니다. 애당초 300명, 그리고 술라가 600명, 카이사르는 다시 900명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특권적 요소가 약화되는 것에 원로원들은 심한 불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아들에게 카이 사리 온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죠. 아들을 낳고 카이사르의 초청으로 로마를 공식 방문합니다. 오늘날 어떤 나라에 공식으로 방문하는 대통령이나 수상과 같은 형식이었겠죠. 그녀가 이집트의 여왕이라는 점보다 최고 권력자인 카이사르의 애인이 왔다는 점이 로마인들의 관심을 더욱더 고조시켰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두 번째는 이집트의 왕으로, 세 번째는 단순한 애인으로 남아 있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영화 전체를 보면 이러한 내용들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로마 최고 권력자에게 그래서 누구보다도 로마의 사회적 가치를 또 윤리기준을 지켜야 하는 그 사람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결혼해줄 것, 또 자신의 아들을 원로원 앞에서 정식 아들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던 겁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사회의 결혼상, 애인은 얼마든지 허용됐지만 두 명의 부인은 둘 수 없었던 것이죠. 아들로 인정되는 것 역시 카이사르에게는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아들이 없었고 또 후계자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주어져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독주와 클레오파트라의 천박한 행동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그 해에 또 다른 애인인 세르빌리아, 세르빌리아는 아주 미녀였다고 해요. 로마 최고의 사교적인 여성이었는데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자 공화파의 선두주자인 블루투스에게 암살당해 죽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마는 다시 경랑 속으로 들어갑니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클레오파트라

레피두스라는 새로운 장군, 또 카이사르의 장군이죠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구축합니다. 레피두스는 일찍 죽습니다. 권력은 다시 당시 18세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와 36세의 안토니우스로 양분됩니다. 두 권력은 거의 10년 동안 카이사르를 죽인 공화파들, 공화파 암살자들, 또 원로원 의원 300명을 죽이게 됩니다. 그런 중에 클레오파트라는 어떻게 하면 로마로부터 이집트를 지킬 것인가를 고심했고 그녀의 고심은 자연스럽게 안토니우스에게 기울어지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역시 카이사르가 그랬듯이 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자와 연애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토니우스를 공략하기에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습니다. 지적이고 아주 냉철한 카이사르와 달리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던 안토니우스는 돈만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쉽게 요리했고, 로마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동생인 정식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결혼해줄 것,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로마인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부인과 이혼합니다.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동생인 옥타비아와 정략결혼했던 것을 무효로 하는 거죠. 무효로 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합니다. 두 번째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로마인으로 인정합니다. 한 발 더나 가죠. 바로 시리아의 땅, 즉 소아시아의 땅을 이집트에게 넘기게 됩니다. 이는 클레오파트라의 농락으로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규범을 깨뜨리고, 로마의 반역자가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두 권력 사이에서 눈치 보고 있었던 언론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상대로 그 유명한 악티움에서 해전을 벌입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게 되죠.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 사리 온도 피살당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마지막에 킹코브라, 이집트의 킹코브라를 가지고 자신의 가슴을 뱀에게 물려 죽게 되는 거죠. 클레오파트라가 그토록 강대국 로마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길 바라고 또 이집트를 지키고자 했지만,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게 되고 약 2천 년 동안 독립된 국가로 탄생하지 못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