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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역사, 영화 내용, 역사적 사실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 종교개혁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 종교개혁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 종교개혁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 종교개혁

영화 '골든에이지'의 흥미로운 이해를 위해 살펴볼 두 번째 배경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와 그의 유명한 여성 편력에 따르는 영국의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영국 절대주의의 초석을 닦은 헨리 7세는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장남 아서, 장녀 마거릿, 차남 헨리 등이 유명합니다. 헨리 외의 나머지 세 명은 일찍 사망합니다. 헨리 7세는 이미 강대국이 되어있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중세 말에 가장 강력했던 국가였던 스페인의 공주(영화 '콜럼버스'에서 스페인 여왕 이사벨의 딸로 등장)이며 로마 교황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던 캐서린과 장남 아서를 혼인시킵니다. 그러나 아서는 아주 병약했고 결국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헨리 7세는 1509년에 자신이 죽기 전 장남의 사망으로 영국의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이미 며느리인 캐서린을 헨리 8세를 왕위를 잇고자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설정하고 캐서린과 혼인시킵니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는 총 6명의 여인과 혼인을 합니다. 첫 번째 여인이 형수인 캐서린입니다. 캐서린은 처음에는 시동생과 잘 지내면서 둘 사이의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메리 튜더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바로 자신의 후계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원했지만 둘 사이에서 딸만 태어났습니다. 헨리 8세는 아버지가 구축했던 절대주의의 기반 속에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통해 절대군주로서의 면모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주도한 영국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났던 루터나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의 지나친 형식주의나 물질주의, 성직에 대한 매관매직에 대한 종교적 이유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루터나 칼뱅은 이에서 출발했지만, 영국은 이와 다른 의미에서 종교개혁이 발생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 원인

헨리 8세가 왕이 되고 나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그는 가톨릭을 보호하는 위대한 호교 자라는 칭호를 받은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러한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의 이유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개인적인 이혼 문제를 들었지만 더욱 실질적인 이유는 영국을 발전시키고 절대주의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귀족 및 종교 지도자들의 권한과 돈을 빼앗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이유에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헨리 8세는 이러한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도원과 교회에서 막대한 부를 빼앗고자 했던 것입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서 왕자가 태어나길 바랐지만, 메리만을 얻었을 뿐 더 이상의 후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헨리 8세는 궁중을 드나들면서 캐서린의 시중을 들던 불린 가문의 딸인 메리와 앤에게 눈독을 들이게 됩니다. 그중에서 헨리 8세는 언니인 메리를 오랫동안 정부로 둡니다. 하지만 호색한이었던 헨리 8세는 동생인 앤에게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정부가 되어달라는 왕의 요구에 동생 앤은 언니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정식 왕비로 만들어주지 않으면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는 요구까지 하게 됩니다. 결국,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당시 교황인 클레멘스 7세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를 직접 관할권에 두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던 캐서린 때문에 교황은 헨리 8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교황의 반대에 부딪힌 헨리 8세는 의회를 설득하여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대장임을 선언하는 수장령을 발표하며 로마 가톨릭과 구분되는 영국 국교회를 선포하게 됩니다.

헨리 8세의 편력

왕의 이런 조치에 대주교 토마스 울지와 주교 존 피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가 왕의 조치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그런 반대를 과감하게 물리치고 모두 처형시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토마스 크랜머라는 사람을 대주교에 임명하여 크랜머로 하여금 캐서린과의 이혼을 주선하고 앤과의 결혼을 선언하게 합니다. 왕의 이런 개혁조치에 대해 의회와 대부분 국민은 기꺼이 찬성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헨리의 개혁이 종교적으로 가톨릭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고, 나아가 로마 교회에 귀속되어 있었던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몰수한 막대한 재산으로 왕실 재정을 튼튼히 하고 충성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의 조치는 영국 국민의 국민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를 얻고자 하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앤에게서도 딸 엘리자베스만을 얻었습니다. 앤이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자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앤이 낳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취급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이내믹하기 때문에 수많은 영화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천일의 앤', '천일의 스캔들', '튜더스' 등의 영화가 그런 것입니다. 헨리는 곧바로 앤의 시녀였던 제인 시무어라는 여성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았고 그가 바로 에드워드 6세입니다. 에드워드 6세는 후에 많이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동화 『왕자와 거지』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 헨리 8세가 가장 사랑한 여인 시무어는 에드워드 6세를 낳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난산으로 죽고 맙니다. 후에 헨리 8세는 자신이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을 시무어의 옆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시무어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기면서 3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던 헨리 8세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폭식으로 뚱보가 되어갑니다. 헨리 8세는 정치적 명분이라는 신하들의 재혼 제의를 받아들여 독일 클레이브 지역의 공작 딸인 안네를 새로운 왕비 후보를 추천받습니다. 헨리 8세는 안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왕실 화가인 한스 홀바인에게 그녀의 얼굴을 미리 그려오게 했습니다. 후에 그 초상화를 보고 그녀에게 반한 헨리 8세는 결혼을 결심하여 서둘러 그녀가 영국 땅을 밟도록 조치를 취하고 몸소 마중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림과 실물이 너무나 다른 것에 실망합니다. 어쩔 수 없이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결혼은 했지만 잠자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혼하게 되며 다시 홀몸이 됩니다. 이후 헨리 8세는 안네가 데리고 온 시녀인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녀였지만 독일에 거주할 당시 캐서린 하워드가 혼전 간통 혐의가 밝혀져 헨리 8세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헨리는 한동안 혼자 지내며 또 한 번의 결혼을 결심합니다. 이번에는 영국의 미망인인 캐서린 파였습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헨리에게 복종했고 헨리 8세의 세 자녀를 성심껏 돌봅니다. 하지만 뒤늦게 결혼 생활에 만족한 헨리 8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헨리 8세는 오래전에 말을 타다 생긴 상처가 악화하여 1547년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헨리 8세는 “자신의 후계자는 에드워드가 그의 자녀들, 캐서린 파의 자녀들, 만약에 아이가 없으면 메리 공주와 그녀의 자녀들, 또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녀들, 마지막으로 자신의 딸과 동명이자 누이동생인 메리의 자녀들로 삼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