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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역사, 영화 내용, 역사적 사실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

지난 2000년에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지난 천 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에 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무고개 식으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까요? 이 사람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로부터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어려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용의주도함으로 자신을 보호하였습니다. 또, 언젠가는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자신을 교육하는 데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 7개 언어를 구사하였고 심지어 고전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책들을 모조리 섭렵했습니다. 이는 후에 이 사람이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교육과 타고난 본능은 이 사람이 당시 복잡하게 뒤얽힌 영국 왕실 내부의 갈등과 이를 둘러싼 수많은 음모 속에서도 침착성과 냉정함으로 평상심을 유지하여 자신이 목표했던 것을 성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절대주의 시대 속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졌음에도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정치적 반대 세력에게 복수와 숙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는 왕국 전체를 순방하는 국민화합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조국의 영광과 국민의 행복을 드높일 수 있을까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16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유럽의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았던 영국을 은색 흉갑을 입고 아마존 여전사와 같이 솔선수범하는 행동으로 강대국 스페인과 프랑스의 위엄을 능가하여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하는 위대한 초석을 만들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입니다.

영화 엘리자베스 이해를 위한 배경 지식

영화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 골든에이지'라는 제목으로 그녀가 통치했던 16세기 말 영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시대를 감독이 표현하고자 영화 제목을 설정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화 '골든에이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배경이 되는 두 가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국의 절대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인 '장미전쟁'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 '잔다르크'에서 중세 봉건국가의 위계와 자존심을 두고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백년전쟁 이후 두 나라는 봉건 영주들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국민의식의 강화, 시민계급의 구체화, 관료제의 형성, 상비군의 유지 등 절대주의 국가 탄생의 현실 속에 나타나고 국왕의 권한, 국가와 국왕의 위상이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는 백년전쟁을 겪고 난 후 봉건영주들 사이에서 활발한 계급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핏줄로 이어지는 작위 귀족(Peerage)인 봉건영주들의 위상 유지에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장자 상속제가 점차 약화하였습니다. 그 대신 차남이나 삼남 그 이하의 자녀들이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데 이를 `젠트리(Gentry)` 계층이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젠틀맨(Gentleman)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농업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며 지대를 받고 생활하는 작은 규모의 지주들을 말합니다. 또한, 이들은 사병과 종사를 거느리고 강제적 권력을 행사했던 작위 귀족과 달리 지역의 의원이나 치안 판사를 하면서 평화와 질서 유지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이러한 계층 분화는 또 다른 계층을 낳았는데 바로 젠트리 아래의 자영 농민을 의미하는 요맨층(Yeoman)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소규모의 자유 토지를 보유하거나 젠트리와 작위 귀족들의 대토지를 임대하기도 하고 직접 농사하며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사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젠트리와 요맨들은 작위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지위와 생활 향상을 위해 봉건귀족들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 사회 안정과 법적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대표적인 두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적색 장미)과 요크 가문(백색 장미)이 중세 말 영국 사회의 봉건 지배권을 놓고 이른바 '장미전쟁'을 벌였습니다. 대귀족 간의 전쟁은 서로의 발등에 도끼를 찍게 되는데 영국 귀족들의 몰락을 스스로 자초한 꼴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귀족층이 스스로 몸에 가한 유혈의 수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강력한 왕의 출현 요구

이러한 상황에서 젠트리, 요맨, 시민계급들은 봉건 귀족들이 지배하였을 때의 무질서를 정화하고 제어하며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강력한 왕의 출현을 갈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랭커스터 가문의 친척이었던 헨리 튜더라는 인물이 영국 의회의 승인을 얻어 헨리 7세로 왕의 자리에 등극하면서 국민이 원하는 안정과 질서를 찾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헨리 7세는 요크 가문의 여인과 정략결혼을 통해 봉건 귀족들 간에 피를 흐르게 하는 파당적인 갈등을 해소했습니다. 또한, 헨리 7세는 의회와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성실청(Starchamber)'을 강화하여 귀족들의 사병 유지를 금지하고 중세 '한자동맹'과 같은 봉건적 상거래를 중단시키고 영국 상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정책을 펼쳐 절대주의 국가 탄생의 초석을 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