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적 배경 - 로마 공화정 말기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지만 지혜로움을 발휘하여 동생들과 환관들을 재건한 후에 이집트의 여왕 파라오가 되었고, 또 당시 지배적 세계였던 고대 로마의 권력자들인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 등을 쥐락펴락한 여인입니다. 여러분들 많이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클레오파트라>라는 제목으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세기의 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출연한 1963년 작품과 또 예쁜 여배우인 레오노어 바렐라가 출연한 1999년 작품입니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대적 상황
영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많이 공부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중동, 아프리카 북부 등을 지배하는 세계제국과 같은 나라로 탄생했습니다. 포에니 전쟁의 결과는 이미 우리가 살펴봤듯이 권력의 양극화, 자영농민의 몰락, 라티푼디움의 성행,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점령한 나라에 대한 로마의 새로운 통치방법의 도입입니다. 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까지 동화시키면서 로마 시민으로 만들어갔던 로마인들이, 이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점령한 지역을 로마 시민과 완전히 구분하는 새로운 통치방법을 도입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날의 식민지의 개념인 속주, 프로빈 키아를 도입하죠. 그것을 군사적으로 능력을 가진 군인 총독으로 하여금 통치하게 만들었습니다. 공화정 말기에는 시민군으로서 로마에 충성하는 것보다 오히려 군사적 힘을 가진 장군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 혹은 용병을 가졌던 마리우스와 술라의 뒤를 이어서 새롭게 삼두가 등장합니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는 속주의 총독들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로마 공화정의 상징이었던 원로원은 개인에게 독재적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가장 혐오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굉장히 공화정을 중요시 여겼음에도 포에니 전쟁 이후 군사적 성공을 거둔 군인들의 야심과 권력 독점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로원은 공화정을 보호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뒀습니다. 그것은 총독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로마 본토의 북쪽 국경지역인 루비콘강까지만 올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총독들이 로마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군사들을 루비콘강 북쪽 편에 두고 몇몇 수의 인원만 데리고 강을 건너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를 위반하게 되면 로마에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공화정 말기에 삼두정치의 한 축이였던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난을 진압하다가 가사를 탕진하고 일찍 사망합니다. 그 이후에 로마는 로마 본토를 포함해서 이집트와 동쪽 지역을 폼페이우스가, 오늘날 영국인 브리타니아 지역과 현재의 프랑스 지역의 속주와 같은 서쪽 지역을 카이사르가 집권하는 이두 체제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하늘 아래 태양이 하나이듯 나눌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항에서 로마의 정치권에 본질이었던 원로원의 선택이었습니다. 공화정 말기, 사병과 막대한 재산을 가진 군인들의 발언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원로원들은 두 가지 면에서 카이사르보다 폼페이우스를 선택하게 됩니다, 첫째는, 카이사르가 평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같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카이사르는 지적인 면에서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들보다 훨씬 똑똑했다는 점입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았던 폼페이우스를 선택해서 자신들이 마음대로 요리하면서 그동안에 실추되었던 원로원의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폼페이우스와 결탁한 원로원은 갈리아에서의 연전 연속으로 시민들로부터 인기가 상승해있는 카이사르를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서 원로원은 황제가 탄생하는 제정기의 황제권 이전에 가장 강력한 권력행사였던 이른바 원로원의 최종 권고인 “Senatus Consultum Ultimum”을 발동하게 됩니다.
카리사르의 결단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거느리지 말고 홀로 루비콘강을 건너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로마를 거역해 본 적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에 이르러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군사들과 함께 이 강을 건너게 되면 로마에 반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혼자 건너게 되면 처형 당 할 것이 뻔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번민의 끝은 결단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당시 그리스 희극작가 메난 도로스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군사를 모아놓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있는 기다리는 그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로 병사들을 설득하고 루비콘강을 건너게 됩니다. 기원전 49년 1월이죠, 카이사르의 정예부대는 루비콘강을 건너서 로마로 진군해 들어갑니다. 이른바 군사 쿠데타, 내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공화정 정부인 원로원으로부터 로마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제대로 된 전투도 한번 치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해서 이탈리아 남부 도시인 브린디시를 지나서 마지막 종착지인 이집트로 도망쳤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집트는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 자격으로 있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당시 이집트의 보호자 신분인 Patrones였는데, 오늘날의 papa, father의 어원이 이 Patrones에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보호해주는 아버지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피보호자 신분이었죠. Clientes, 즉 고객이었기 때문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카이사르에게 반격을 가하게 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나 운명은 그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당시 이집트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변해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시체를 훔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새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데 로마의 내전이 이러 날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막 죽고 이집트의 권력이 이양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됩니다. 하나는 맏공주 클레오파트라와 맏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형매 혼을 통해 이집트의 공동 파라오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만약에 아들이 첫째로 태어나지 않으면 첫째로 태어난 누이와 남동생이 결혼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공동 파라오가 되도록 했던 거죠. 그 전통을 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로마인의 친구이자, 로마의 동맹자로 계속 남아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를 유언을 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입성할 당시인 기원전 48년에, 이제 막 21세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이집트의 환관들의 농락으로 파라오 자리에서 추방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도망 왔던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이집트 관리들에 의해서 목이 달아났고,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군의 이집트 총사령관이었던 소 카토, 대카토와 소 카토가 로마 사회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대카토는 아까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를 마지막 멸망시킨 사람이고, 지금 나오는 소카 토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두 사람 모두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인물들이었죠. 바로 그 소 카토, 증손자 카토가 폼페이우스군의 이집트 총사령관이었습니다. 카토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카이사르 군대를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한 가지 하고 가겠습니다. 이 카토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반대한 유일한 공화파 의원이었습니다. 근데 그 아주 바른 사람이었죠. 아주 입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 카이사르 권력과 군사력에 눈치를 보았던 반면, 카토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이 카토가 비록 적이었지만 살려주고자 했던 것이죠. 카이사르는 그가 살아서 자신의 정부에서 함께 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카토는 몇 번이나 카이사르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회유하는 편지를 받아요. 그 편지를 받고 카토는 마지막으로 선택을 합니다. 자기 배를 3번이나 찌르죠. 그래도 죽지 않아 결국은 그 자기 배의 뚜껑을 엽니다. 그리고 창자를 끄집어서 진중에 걸고 죽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카토의 죽음이라는 책으로 유럽에서 혹은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엄청나게 유행하게 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그 카토의 죽음이라는 책을 보고 바로 로마 공화정의 기본 기본 정치체제를 미국 공화국을 만드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 미국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카토의 죽음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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