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르타쿠스로 보는 고대 로마의 노예제도
포에니 전쟁의 결과를 살펴보면, 이런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지중해를 하나의 자신들의 바다, 우리의 바다라는 개념으로 확보하고 진정한 군사적 패권국가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군사적으로 강대한 국가가 됐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승자의 혼미, 바로 승자 한 사람들은 '오히려 혼미하다'는 상태가 되어 공화정이 몰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우선은 권력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기존 귀족들이었던 토지 귀족들인 원로원들입니다. 이러한 기존 귀족들과 전투 혹은 카르타고의 여러 식민 시의 세금을 통해 부자가 된 신흥 귀족 간의 권력의 양극화 현상, 즉 권력투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로마 시민의 주력군인 자영농민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말할 것 같으면 이런 것이죠. 세금을 내고, 군인이 되는 중산층 세력들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결과는 바로 그 많은 노예들이 잡혀 옴으로써 농민들이 농사지을 수 없었던 버려진 땅을 로마시에 있는 부자 즉, 기존 귀족들과 신흥 귀족들이 버려진 땅을 in my pocket 즉 자신들이 사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대토지 농장을 만들게 되죠. 그것이 라티푼디움이라는 것인데. 그러한 대토지 농장이 유행하게 되고 그만큼 자영농민들은 몰락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3S사업이 유행했습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바로 3S 중에 하나인 스포츠를 이해도록 해줍니다.
통치 방법의 변화
또 하나의 변화는 통치 방법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데요. 로마는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로마의 동맹 시들 즉, 자치시, 동맹 시, 식민 시 이렇게 구성되어있었고 그 나라들 모두 로마 시민권을 받았죠.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에 자치시, 동맹 시, 식민 시 이외에 새로운 제도가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식민지의 개념인데 속주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프로빈 키아라는 오늘날 프로빈스는 지방이죠. 속주였습니다. 그 속주에 징세 청부업자들은 파견하고 많은 세금은 거두어들이는 제도를 만들었던 거죠. 공화정 때까지만 하더라도 건전했던 시민 정신이 와해되고 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됐던 겁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힘이 있는 군인들이 등장하게 되죠. 공화정 말기의 로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몰락해가는 국가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개혁세력 또한 군인들과 같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는데,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가 등장합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를 한니발로부터 구한 스키피오 장군의 외손자였습니다. 호민관으로 발탁되었던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실시하는데, 그 개혁의 핵심이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내는데, 리키니우스 법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리키니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이 법은 기원전 376년에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귀족들이 라티푼디움을 만들어서 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만 할 수 있도록 했던 거죠. 그것은 자영농민들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둘 다 암살당하고, 로마 공화정의 운명과 같이 두 사람의 운명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이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파, 그리고 그동안에 성장했던 평민파로 대립되게 됩니다. 그 가운데 군인 정치군인들이 들어서게 되는 거죠. 가장 먼저 권력을 잡은 평민 출신의 군인은 마리우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영농민의 몰락으로 지원자가 줄어드는 로마 군대의 수를 확대하고자 봉급, 보너스, 토지 등을 하사하면서 무산자들 즉 재산이 없는 사람에게도 군인이 될 수 있는 개방적인 경제계획을 실시합니다. 자연적으로 로마의 군인들은 국가보다 개인인 마리우스에게 더 충성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의 군대는 시민군의 정신이 아니라 개인 사병으로서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런 중에 로마에 막대한 세금을 냈지만 시민권을 받지 못했던 동맹 시들, 여러 동맹 시가 있었는데 동맹 시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반란이 일어나자 마리우스의 부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원로원 파이자 정통적인 귀족이었던 술라는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마리우스를 물리치고 스스로 집정관이 됩니다. 그는 평민파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원로원을 독점하게 됩니다. 원로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고, 그러한 정치체제를 만든 후 스스로 자기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술라가 물러난 후에 로마는 3명의 유력한 군인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원로원 파인 폼페이우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던 세금을 거두는 사람을 관리했던 신흥 귀족인 크라수스, 평민 파였던 카이사르입니다. 이들은 기원전 60년경에 3명이 권력을 나눠서 연합하면서, 최초의 정치체제인 제1차 삼두정치를 실시합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노예 반란에 관한 영화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이러한 삼두정치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인 기원전 73년부터 71년 동안에 걸쳐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노예 반란에 관한 영화입니다. 로마의 노예는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데, 그리스 노예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 노예는 한번 노예이면 영원한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노예는 자신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노예 신분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던 거죠. 그러나 이러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로마 노예들은 늘 죽음을 옆에 끼고 순간순간을 살아간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치와 향락문화가 만연했던 공화정 말기의 로마에는 많은 스포츠가 대대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 카푸아라는 도시에 검투사 노예들을 기르는 양성학교, 바로 검투사 양성학교가 유행했습니다. 이곳의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나는 말하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동료 검투사들과 반란을 일으켜 100년 후에 화산이 폭발하는 베수 비어스 산 근처로 본거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약 7만 명의 노예들이 반란을 주도하고 로마의 위기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로마는 삼두정치의 한 축인 크라수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8개 군단을 파견해 노예 반란을 토벌하게 했고, 크라수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연전연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로마의 전통 처벌법인 데시메이트를 이용합니다. 데시라는 것이 시위이고, 메이트는 끝낸다는 것인데 이렇게 부하들인 로마 군사들에게 줄을 서게 합니다. 1에서 10까지 줄을 세우게 하는 거죠. 1,2,3,4,5,6,7,8,9,10되는 군사들은 앞으로 나오는 겁니다. 20번째 되는 애가 앞으로 나오고, 그렇게 해서 10명에 1명꼴로 같은 동료 9명이 몽둥이로 쳐 죽이는 겁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로마군의 기강을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거죠. 거기에 생포한 6천 명의 노예들을 아피아 가도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이후로 로마에는 이렇다 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정기가 되면서 로마의 노예제도는 점차 하나의 신분제도가 아니라 취급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잘못해서 빚을 지게 되면 자기가 스스로 검투사 노예가 되는 겁니다. 돈을 벌고 그 빚을 갚고 다시 평민이 되는 그러한 과정들이 로마 제정기에는 이루어집니다. 굳이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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