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럼버스에서 항해 배경과 이유
대서양 서쪽 항로(동양으로 가는 항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콜럼버스는 1483년 항해에 대한 후원을 받기 위해 이른바, 'one-paper` plan을 작성하여 당시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국왕 주앙 2세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은 일찍 주앙 2세의 아들이자 바다의 왕자로 불리는 엔리케 왕자가 세운 해운 학교 덕분에 포르투갈의 탐험가들(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등)이 이미 아프리카와 인도를 탐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포르투갈 국왕은 콜럼버스를 몽상가 내지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그의 계획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1486년에 경쟁국인 스페인 왕실에 제출하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카스티야,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곤, 그리고 남부 그라나다 세 나라로 중세 말기에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왕의 자리를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었던 이사벨 여왕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왕자에게 청혼하여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까지 공략하며 스페인 반도를 통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콜럼버스가 원페이퍼 플랜을 제출한 것)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1492년에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을 찾아가 위대한 스페인 건설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통일 후 이사벨 여왕은 대내적으로는 종교적으로 자유로웠던 스페인을 가톨릭으로 강제 통합시키며 수많은 유대인과 이슬람인을 화형 또는 추방하였습니다. 이렇게 추방된 이슬람인과 유대인들을 수용한 네덜란드와 영국 같은 나라가 그 이후에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대외적으로는 탐험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여 가톨릭을 전파하고자 했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one-paper 'plan이 빛을 발하게 도와줍니다.
콜럼버스 항해와 후원
1492년 4월 스페인과 콜롬버스 개인의 조약인 이른바 '산타페 협약'(세습권이 인증되는 제독의 자리, 새로운 땅에 대한 총독의 지위, 모든 이익의 10% 취득을 명시)을 맺습니다. 또한, 콜럼버스는 항해에 대한 모든 것을 후원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콜럼버스는 90명의 선원과 함께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깃발과 십자가를 단 3척의 배, 산타마리아, 핀타, 리나호를 타고 스페인의 서쪽 항구인 팔로스 항을 출발했습니다. 당초 콜럼버스는 6주에서 7주 정도의 기간을 예상하고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아무것도 찾지 못한 선원들은 선상반란의 기운을 조장했지만 이를 잘 무마시킨 콜럼버스는 10주가 되는 10월 12일에 드디어 새로운 땅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재 쿠바 남쪽에 있는 바하마 군도에 있는 어느 섬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이 섬이 자신을 보호했다고 하여 성스러운 구원자라는 뜻의 '산 살바도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곳은 현재 엘살바도르의 수도입니다. 발견의 시대에 귀중한 씨앗과도 같은 항해는 이후 세 번이나 진행됩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토록 찾고자 했던 후추와 황금은 찾지 못하며 자신이 발견한 그곳이 죽을 때까지 신대륙이 아닌 인도의 어느 섬이라 믿은 채 1506년에 큰 빚을 가지고 사망합니다.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얼마 후에 알게 되며 그의 흔적은 역사 속에 남게 됩니다. 신대륙 발견 이후 콜럼버스가 처음 만난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인디언)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또, 콜럼버스가 첫발을 내디딘 그곳을 오늘날 우리가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대륙은 분명히 콜럼버스가 발견했지만, 그곳의 이름은 콜럼버스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라는 중세의 유럽에서 가장 부자 집안인 메디치 가문은 메디치 은행, 중세의 중심 사업 모피 산업, 모피를 물들이는 데 필요했던 백반 산업을 통해 돈을 엄청나게 번 가문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사무원이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람이 콜럼버스가 항해를 한 지 5년 후에 스페인의 메디치 지점에 파견됩니다. 당시 베스푸치는 여러 경험을 통해 주인인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로렌초 메디치에게 많은 구원을 받고 브라질을 탐험한 후 그곳이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땅임을 확신하는 편지를 주인에게 보냅니다. 영화를 보면 살라망카 대학의 위원회에서 콜럼버스 항해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하게 되는데 여기서 신대륙은 아메리고 베스푸치 덕분이라고 밝혀집니다. 비록 신대륙의 이름은 1507년에 '아메리쿠스'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이곳의 최초 발견자는 진정한 용기와 추진력을 가진 콜럼버스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콜럼버스는 왜 항해를 하고자 했던가?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의 탐구 정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험심, 깊은 신앙심의 발로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파하기 위한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역사적으로 규명된 사실로 볼 때 중요하지 않고 경제적인 욕구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한 이유
그렇다면 콜롬버스는 왜 항해했을까요? 물론 그에게서 인간의 탐구 정신과 종교적 신념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항해를 자극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적 이유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콜롬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해를 개척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중세 말기 음식문화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유럽인들은 밀,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였지만 12세기에 유독성 깜부 깃 병인 맥각 중독(보리나 밀에 탄화되어버려 바람에 나려 다른 일반적인 밀에 전파되는 것)이 유럽 대륙 전역에 퍼지면서 밀의 수확량이 급속도로 줄어듭니다. 이때 먹을 것이 없던 중세인은 소, 양, 닭 등을 길러 육식을 주로 하는 음식문화로 변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인은 육식동물이라고 불릴 만큼 고기를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당시 중세인은 가축에게 주로 떡갈나무 열매를 잔뜩 먹이고 12월에 한꺼번에 도살하여 일 년 내내 저장하여 먹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금으로 절였다고 해도 절인 고기에서 나는 냄새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기의 악취를 제거하는데 후추는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중세 이후 후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또한, 중세인들은 후추를 맛의 증진이나 강장제, 건강증진제, 살균제 역할로 믿어 사용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중세인들은 후추와 같은 향신료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유럽에서 향신료를 재배하고자 하였지만, 이는 인도를 비롯한 동양에서만 재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유입되는 후추 값은 금과 은의 가격을 초월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경우에는 후추 한 자루와 공국 전체를 바꾸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이슬람 상인들에게 가는 중간 이익을 탐탁지 못하게 여긴 유럽인들은 직접 후추를 수입하길 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콜럼버스의 인도로 가는 계획이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후추는 육고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가톨릭 신도였던 유럽인들은 사순절에서 유월절 사이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육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교회와 수도원, 가톨릭 신도들은 육고기 대신 생선을 먹었습니다. 지중해의 참치와 고등어, 대서양의 황어와 대구, 북해지역의 청어는 유럽인들의 단백질을 담당하는 중요한 물자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중세인들이 대구와 황어를 잡기 위해 콜럼버스보다 훨씬 이전에 대서양을 횡단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간에 이러한 생선은 한꺼번에 잡아 두어 절였기 때문에 후추는 유럽에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는 후추 이야기보다 황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물론 황금을 찾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으나 콜럼버스의 본래 목적이 아닌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인디언을 노예로 잡아오는 것도 부수적이었으며 후추가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비록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1차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콜럼버스는 이후 대대적인 준비를 하여 2차 항해를 위해 1,200명의 선원들을 모으고 17척의 배에 구대륙의 말, 개, 돼지, 소, 닭, 양, 염소, 양파, 올리브, 복숭아, 배, 커피, 바나나, 사탕수수, 귀리, 밀 등을 가지고 항해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유럽 대륙의 산물이 신대륙에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매독, 천연두, 수두,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들도 신대륙으로 전파됩니다. 이러한 질병 때문에 상당수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희생됩니다. 어떤 역사가는 “70%의 인디언이 구대륙에서 넘어온 전염병에 의해 죽었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인디언이 전염병에 의해 사망합니다. 2차 항해를 마치고 콜럼버스가 돌아오는 길에 신대륙의 물건을 가지고 유럽으로 돌아옵니다. 대표적으로 칠면조, 호박, 카카오, 옥수수, 토마토, 감자, 카사바, 피망, 고구마 등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가져온 옥수수나 구황작물은 17세기 유럽 인구가 급증할 당시 식량난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대륙의 산물과 구대륙의 산물이 교환되는 것을 1972년에 환경 역사가인 알프레드 W. 크로스비는 '콜럼버스의 교환(Colombian Exchange)'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콜럼버스가 아니었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루어졌겠지만, 이는 오늘날 우리의 식탁이 다양하게 된 것은 콜럼버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콜럼버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꼭 소개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제레드 다이아몬드라는 작가가 쓴 『총, 균, 쇠』라는 책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이 책에서 총과 철과 세균을 가진 문명이 그러지 못한 문명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궁극적으로 문명을 파괴하거나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는 과정들을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이룩한 잉카문명, 마야문명 등도 그런 스페인의 총과 세균 등으로 몰락해 갔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인 바로 콜럼버스와 달걀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신대륙을 성공적으로 발견한 콜럼버스를 스페인 귀족들이 질투합니다. 물론, 이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콜럼버스는 그들에게 달걀을 세워보라는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세우지 못하자 콜럼버스는 달걀을 깨트려 세웁니다. 이는 생각을 다르게 하는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 일화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생각을 다르게 하는 시도야말로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위대한 리더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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